그리운 밤, 창문을 열면 떠오르는 어느 여름날의 향기와 이야기

그리운 밤, 창문을 열면 떠오르는 어느 여름날의 향기와 이야기  

어느새 창밖의 바람이 따뜻해졌다. 겨울의 매서운 찬 기운이 가시고, 부드럽게 피부를 스치는 바람이 봄의 시작을 알린다. 이런 날이면 문득, 오래전 여름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창문을 열어젖힐 때마다 스며드는 공기 속에서 그 시절의 향기와 소리가 함께 밀려오는 것만 같다.  

그날도 창문을 열었다. 바깥은 여름 특유의 습한 공기가 가득 차 있었지만, 밤이 되면서 그 열기가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다. 집 앞 골목길에서는 아이들이 마지막 남은 해를 따라 뛰어다니며 노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선가 바람을 타고 익숙한 라디오 소리가 희미하게 흘러왔다. 여름밤 특유의 고요함과 함께 섞인 그 소리는 이상하게도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나는 창문을 활짝 열어둔 채로 한참 동안 그 순간을 음미했다.  

어릴 적부터 여름밤을 유독 좋아했다. 더운 낮이 지나가고 선선한 공기가 온 세상을 감싸는 순간이 좋았다. 하루 종일 햇볕을 받아 뜨겁게 달아올랐던 도로와 벽돌담이 밤이 되면 서서히 열기를 내보내며 식어가는 것도 신기했다. 그 위를 맨발로 조심스레 걸어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따뜻함과 밤공기의 차가운 느낌이 묘하게 어우러지던 그 감각은 오랫동안 잊히지 않았다.  

그날 밤도 그런 느낌을 떠올리며 창가에 기대어 있었다. 멀리서 개구리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름이면 어김없이 들리는 그 소리는 늘 같은 듯하면서도 조금씩 달랐다. 처음에는 그저 소음처럼 들렸지만, 가만히 듣다 보면 마치 서로 주고받는 대화 같았다. 개울가 풀숲에서, 담장 아래에서, 그리고 들판 너머에서 저마다의 목소리로 여름밤을 채우고 있었다.  

바람이 살짝 불어오자 어디선가 익숙한 냄새가 났다. 물기 머금은 흙냄새, 먼 곳에서 피어나는 나무 냄새, 그리고 약간의 풀비린내가 섞인 공기였다. 순간, 아주 어린 시절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도 이런 냄새가 났다. 마당에서 뛰놀다가 지쳐 바닥에 드러누웠을 때, 위로 펼쳐진 밤하늘이 그렇게도 넓고 깊게 느껴졌던 순간. 손을 뻗으면 별을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았던 그때의 감각이 지금도 생생하다.  

여름밤의 향기는 특별하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과거의 어느 순간으로 나를 데려다 놓는다. 나는 여전히 창문 앞에 서 있었지만, 마음은 한참 전 그 여름날로 가 있었다. 그날의 공기, 그날의 소리, 그날의 냄새가 다시 내 곁에 와 닿았다. 그렇게 나는 오랜 기억 속에서 잠시 머물다 돌아왔다.  

문득,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창문을 열고 같은 바람을 맞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도 나처럼 여름밤의 향기를 맡으며 무언가를 떠올리고 있을까.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면, 아마도 이런 순간들이 아닐까 싶다. 여름밤의 바람과 그 속에 녹아든 수많은 기억들처럼.